정아, 사랑스러운 그대의 곁을 떠나려니 마음이 한없이 착잡하구나. 비록 우리가 헤어졌다할지라도 언젠가는 서로가 만날 줄 알았는데.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내 눈 앞을 가로막아 선다. 누군들 그대를 보고 반하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그대를 보자마자 몸이 바싹 굳고 눈이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사나이들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대는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대는 나를 택했고 나와의 대화를 바랐었다. 모두가 가버린 뒤에도 그대는 나와 함께 남아 있었다, 영어 강의를 듣겠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리고 우리는 강의실에 남아 많은 얘기를 했었다.
그대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어느 한 곳 흠잡을 곳이 없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중에 나의 뺨에 드리워진 그대의 머리칼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나를 애무했었다. 그것은 봄날에 귓가를 스치는 아지랑이 머금은 바람과도 같았다. 빛을 발하는 흑진주의 머리칼은 순결의 빛마냥 하얀 살결과 조화를 이루어 현란한 아름다움을 빚어내었다. 아아, 차라리 그대가 아름답지 않았다면 이렇듯 헤어짐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텐데. 그대는 미의 여신, 바다의 물거품에서 막 태어난 아프로디테였다. 그때엔 그대와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하였다. 이렇듯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처녀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황홀하기만 했었다. 그러기에 오히려 나와 그대 사이가 진정 가까운 사이인가하고 의심까지 했었다.
정아, 그대는 지금도 나를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가극 리골레토에 등장하는 만토바 공작의 '여자의 마음'이라는 가곡처럼 과거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즐거운 일에 몰입되어 있는가?
오늘 그대를 행여나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아랫장터를 자전거로 누볐다. 나의 친구는 영문도 모르는 채 나와 동행했다. 그에게는 다만 마지막으로 아랫장터를 한번 돌아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정아 그대는 안보였다. 문득 하늘 빛 옷을 입은 한 여인을 뒤에서 보았을 때, 그대인 것 같아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앞으로 다가가서 보니 어떤 부인이었다. 그때 나의 가슴은 예전에 그대를 그냥 보내버린 데 대한 후회로 미어질 듯 하였다. "붙잡아 두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나는 자꾸만 되뇌이고 있었다.
정아, 그대는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 고향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대를 보고파하는 나의 마음을 그대는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는가? 그대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친구와 나는 아랫장터를 떠났다. 친구는 장대다리 곁에 강둑의 길로 자전거를 몰았다. 그는 우연히 그 길로 접어 들었겠지만, 나의 가슴에는 아련한 추억이 와 닿았고 콧날이 시큰하였다. 그날 나는 그대를 보낸 후 이 강둑을 자전거로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고 조금이라도 그대 가까이 있고픈 심정에서였다. 지난 날의 나의 심정과 이 순간의 나의 심정이 서로 이어지자 불현 듯 애달픈 심정이 되었다.
정아, 그대는 이러한 나의 마음을 아는가? 문득 나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유전(流轉)'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말. 분명 그 날 장대다리 밑을 흐르던 물과 오늘 흐르는 물은 다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않고 그대를 그린다. 사랑이란 유전을 뛰어넘는 것, 영원한 지속을 가져올 수 있는 것, 그러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것!......
정아, 보이지 않는 그대에게 이렇듯 말하는 것은 허무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우리 헤어졌지만 영원히 잊지말자. 얽히고 섥힌 추억들을 어린 시절의 동화마냥 가슴 속 깊이 간직하자.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함으로 변전(變轉)하는 세계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자.
정아, 사랑한다.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그 애달픔이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변화한다. 일체의 운명의 줄을 끊어 버리면서 이 순간에도 그대를 사랑한다. 미완(未完)의 운명을 지닌 사랑이라면 그것을 거부하고 새로이 사랑을 생성(生成)시키는 것이 바로 나의 할 일이다.
정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사랑으로 사랑한다. 이 사랑은 시간과 공간의 범주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다. 일체의 것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랑이다.
정아, 나는 그대를 죽도록 사랑한다. 이 사랑은 현실 속에서 쉼 없이 눈물 흘리는 사랑이다. 시간에 의해 잊혀지고, 공간에 의해 옅어지는 것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부딪히고 상처입는 사랑이다.
정아, 나는 현실 속에서 쉼없이 눈물 흘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벗어날 때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사랑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문득 실상(實相)은 현실 속에서 쉼없이 눈물 흘리는 사랑이 곧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사랑이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새로운 사랑이 곧 현실 속에서 쉼없이 눈물 흘리는 사랑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정아, 어여쁜 소녀, 나의 혼돈의 시원(始源)!
청춘 시절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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